<한국YWCA연합회 2015.6 회보>
마사초, 그림자로 병자들을 고치는 성
베드로
세상을 치유하는 기독교

마사초(Masaccio, 1401~1428년), 그림자로 병자들을 고치는 성 베드로,
230*160cm, 1426~7년, 이탈리아 피렌체 카르미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실 그림 출처 : Masaccio, Giunti
Industry Graphic, Florence, 2003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은 15세기의
길(비아 콰트로첸토, Via Quattrocento)에 놓여 있다. 건축가 브루넬레스코, 조각가 도나텔로, 그리고 화가 마사초는 그 길 위의
대표자들이다. 1401년에 태어나 27세에 요절한 마사초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안에 그린 ‘삼위일체’(1424~1427년
사이)를 통해 처음으로 회화에 원근법을 적용한 화가다. 마사초에 의해서 회화는 비로소 평면에 공간을 획득하였고, 관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대가들은 마사초의 그림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관점과 표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부속 브란카치 예배실
왼쪽 맨 위에 마사초의
‘낙원으로부터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그 맞은편에 마솔리노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가 있다. 이 두 작품은 자리처럼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를 가름한다.
피렌체 아르노 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걷다보면 1422년에 헌당한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이 나온다. 건물은
외관상 썰렁하고 허름하다. 내부도 별로 특별한 건 없다. 18세기에 화재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당 옆의 부속 건물인
브란카치 예배실에는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작품들이 제단 벽을 장식하고 있다. 바로 마사초가 그린 ‘낙원으로부터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일련의 프레스코(fresco, ‘신선하다’는 뜻,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다. 제단 정면 왼쪽 아래에 오늘의
그림이 있다. 얼마 전 열흘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녔던 피렌체를 떠나는 날에서야 카르미네를 찾았다. 만약 그냥 왔다면 나는 한없이 자책했을
것이다. 피렌체는 그런 곳이다, 떠나는 순간 다시 발길을 돌리고 싶은, 그런!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심지어 병자들은 제자들이 지나갈 때 그림자만이라도 자신에게 덮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행전 5;15). 그 간절함과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다르게 하였다. 마사초는 이 장면을 포착하였다. 상류층 인물들만 그림에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마사초는 과감하게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화면에 옮겨놓았다. 배경도 성전이나 궁전이 아니라 서민들의 주거지역이다. 그 거리를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간다. 베드로는 제자 중 연장자였기에 늘 흰 머리와 흰 수염의 노인으로 묘사된다. 그 권위는 그대로 로마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로 전이된다.
반면 요한은 늘 어리고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된다. 제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네 명이 기다리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빨간 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 맨발에 두 손을 모으고 제자들을 바라보는 남자, 상반신을 거의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양 팔을 모은 가난해 보이는 노인, 그리고 마른
막대처럼 앙상한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앉아 팔 받침대를 괴고 큰 눈으로 바라보는 앉은뱅이 청년, 화면 앞쪽으로 올수록 이들의 상태는 위중하다.
이 길을 주님의 제자가 걷는다. 믿음과 능력, 사랑과 애처로움으로 걷는다. 제자들의 그림자가 앞 쪽 가장 힘든 두 병자에게 걸쳐있다. 이제
이들은 곧 자리를 걷고 일어날 것이다. 평생 이들을 옭아매던 질병과 가난의 삶을 훌훌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와 생명을 누릴 것이다.
초대교회는 상처 입은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과 권능을 간직하고 있었다.
2000년이 지난 세상은 구석구석 여전히
아프다. 세월호의 고통이 1년이 훌쩍 넘도록 끝나지 않고 있다. 어떤 유가족 부녀는 팽목 항에서 광화문까지 500km를 세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하면서 4개월 째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 21세기 한국사회의 비아 돌로로사다. 예상치 않았던 메르스의 죽음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영화
‘감기’의 무서운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우리는 모두 공포에 갇혀 있다.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를 향한 몸부림이 안쓰럽기만 하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은 6년 동안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공장 밖을 맴돌면서 날마다 절망과 싸우고 있다. 죽음의 송전탑 공사를 맨몸으로 막아서면서
밀양과 군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쇠약해지고 있다. 같은 노동을 해도 너무나 명백한 차별대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숨죽여 흐느끼고 있다. 청년
세대가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107년 만의 6월 상순 최고 기온과 기나긴 가뭄으로 땅과 강이 타들어가고 있다. 세상이 피조물의
탄식으로 울렁이고 있다. 만물이 구원의 주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비처럼 절실한 때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만이라도 비추어 죽음 같은 고통의 자리에서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의 후예인 오늘의 기독교가 이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을 살리지 못하는 기독교는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할 때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믿음을
통해 생명과 권능의 자리로! 기독교는 탄식하는 피조물을 치유해야 한다.
이훈삼목사(성남주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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