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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제발!
"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
그는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 (이사야
42:18,20)

미켈란젤로(1475~1564년),
최후의
심판(부분),
1534~1541년,
1370*1220cm,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
그림 출처
:
고종희,
명화로 읽는
성서,
2000년,
한길
아트
목회자로서 부닥치는 난관의 기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적 경향이 놓여 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일반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인 나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그렇다.
초대교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믿는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목숨을 걸어야했었다.
그리고 수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걸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믿음을 지키려다 끔찍한 방식으로 죽어갔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잘 보장되어 있고 교회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성한 프로그램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신앙은
전반적으로 늘어져 있다,
아주
많이!
이제 60줄에 들어선 노구의 화가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교황을 선출하는 시스티나 성당
제단 벽면에 거대한 성화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높이는
13m가 넘고 길이도
12m가 넘는 벽에다가 하나의 주제를
프레스코 화법으로 채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2년 동안이나 이리 핑계 저리 핑계
대며 교황의 명을 피하려 하지만 언제까지나 회피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작업에 착수하고 만다.
그것도 바로
옆방에서는 당대 떠오르는 샛별 라파엘로가 그 유명한 ‘아테네 학당’을 그리고 있다.
노련한
정치가인 교황은 최고 화가들의 자존심과 경쟁의식을 그들이 사용할 물감 속에 풀어 넣은 것이다.
작품 자체가
주는 부담감도 견디기 힘든 것일 텐데,
세간의 이목이
두 거장의 경쟁에 모아져 있으니 이 또한 무척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교황의 작전이 성공했고 우리는 그 덕분에 지금 걸작을 보는 것이지만!

전체 벽면 중앙에 멋진 근육질의
젊은이 모습으로 힘차게 걸어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쪽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세상에
진동한다.
날개 없이
벌거벗은 육체의 천사들은 인생과 역사에 종말이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은 잔뜩 긴장해 있고 긴 나팔을 입에 물고 힘을 주는 천사의 양쪽 볼은 바늘로 찌르면 금방 터져버릴 듯이
빵빵해졌다.
왼쪽 곱슬머리
천사는 얼마나 힘을 주는지 눈동자까지 허옇게 돌아가 있고,
오른쪽 천사는
엄지발가락에게까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팔을 불고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제 최후의 심판이 도래했다는 것을 고지하고 있다.
이 소리를
들어라,
귀를 막지
말고 역사의 주인이 하시는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들어라!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은 구원받은 이들이 영생의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고,
오른쪽은
심판받은 이들이 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이 벽화의 큰 구도다.
최후의 심판을
맞아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들의 이름을 어느 천사가 부르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영원히 갈린다.
아,
그런데 이
초조한 순간에,
30년
전,
이미 대작
‘천지창조’를 그림으로써 같은 성당의 천장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은 미켈란젤로가 이제는 그때 보다 훨씬 비관적인 전망에 기울어져 있다.
왼쪽 천사가
들고 호명하는 생명책은 크기도 작고 부피도 적은 반면 오른쪽 심판받을 불행아들의 명단이 적힌 책은 크고 두껍다.
구원받을
사람보다 심판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들이 월등히 많은 것이다.
화가는
30년의 세월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목격했던 것일까!
미켈란젤로에 2000년 앞서서 이사야는 피를 토하듯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음성을 쏟아낸다.
귀먹은
자들아,
눈먼
자들아,
들어라!
들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보아도 마음에 새기지 않는데 어떻게 심판을 피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느냐고 일갈한다.
정말 구원받기
원한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활짝 열어 집중해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역사를 보라고 소리치고
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목쉰 이사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답답하기는 주님도 마찬가지셨나
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주님의 안타까운 호소를 우리는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리
보여주어도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귀와 눈을 열지 않으면 듣고 볼 수 없는 것이 복음의 특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슴은 우리 때문에 지금도 뛰고 있으며,
주님의 절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
들어라,
제발!
<이훈삼 성남주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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