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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앙제의 태피스트리 : 새 예루살렘, 150*249cm, 1380년경, 파리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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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18년 11월 25일 13시 37분 52초

프랑스 앙제의 태피스트리 : 새 예루살렘, 150*249cm, 1380년경, 파리

신앙인으로서 늘 궁금한 것은 무엇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순교하게 했을까 하는 점이다. 순교는커녕 사소한 것에도 너무 쉽게 세속과 타협하고 아주 작은 십자가에도 버거워하며 우는 소리하는 나 자신을 경험할수록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하나뿐인 목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가장 고상한 사형법인 교수형에도 온 몸이 공포의 경련을 일으킨다는데, 불에 태워 죽고 사자에 갈기갈기 찢겨 죽고 톱으로 쓸려 죽고 돌에 맞아 죽고 피부 껍질이 벗겨져 죽고 큰 칼로 목이 덜커덩 잘려 죽는 그 현장에서도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2000년 전에는 지식도 과학도 발달하지 않았고, 볼 것도 읽을 것도 들을 것도 놀 것도 별로 없는 시대였다. 지식과 놀이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 그 대신 그들은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때로 꿈으로 또 때로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환상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시대 전체에 걸쳐 나타나 집단적이기도 했다. 그 핵심에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 비록 지금은 온갖 고난에 내던져져 너무나 두렵고 아프고 힘들지만 이 순간만 견디면 영원한 새 세계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세속의 모든 유혹과 시련을 이기게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스데반의 돌에 맞는 처형, 수십 개의 돌에 맞아야 비로소 죽을 수 있는 그 형장에서도 보여준 스데반의 초인적 의연함은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하늘에 영광스럽게 거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모순된 세상과 정반대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중세에는 실로 큰 그림을 짜서 벽을 장식하는 태피스트리가 발달했다. 14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이 작품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밧모 섬의 요한이 주제다. 끔찍한 박해가 이어지는 죽음의 시대에 요한이 왼 손에 계시록일 책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놀란 얼굴로 새 세상을 바라본다.

새 시대,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책과 노력과 운동을 통해서 건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가 있지만 새 예루살렘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오른 손을 들고 왼손은 새 세상을 가리키고 계신다.

황금색 새 예루살렘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중세 사람들이 보고 경탄한 육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채와 높고 가볍고 찬란한 고딕 양식의 교회를 합해 놓은 것 같다. 요한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과 신실한 신앙인들은 오늘처럼 맑고 파란 저 하늘 어딘가에 나를 위한 새 예루살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환상적 믿음은 인간의 연약함을 초월하는 믿음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1969년 7월 20일, 위대한 퍼스트 맨 암스트롱이 달에 인류의 첫발을 내디딘 후로 하늘은 이제 더 이상 옛날 그 하늘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옥좌가 있고 그 우편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황금빛으로 충만한 예루살렘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우주는 단지 적막하고 어두운 끝없는 공간이며 하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거처가 단지 은하계 안에서 밖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다. 아예 우주로부터 하나님의 거처를 박탈해버렸다. 하늘에 있다가 내려올 새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현대인과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거처를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순교하려고 해도 순교자 앞에 열릴 하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새 예루살렘이 곧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가장 잘 표상하는 것이었는데 과학은 이를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진보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갈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니 순교는 너무 먼 일이 되어버렸다. 죽을 곳을 잃어버린 기독교에 독처럼 퍼지는 것은 탐욕과 죄악이다. 오늘 우리다.

우린 이제 어디서 새 예루살렘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