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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코레조, 나를 만지지 마라, 130*103cm, 1525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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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0년 05월 23일 21시 25분 12초

<2020.5.24. 주보 그림>

코레조, 나를 만지지 마라, 130*103cm, 1525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주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슬퍼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다(요한 20:16~17). 놀란 마리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만지려고 하자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놀리 메 탕게레).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예수님과 마리아가 단 둘이 나누는, 그것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터치하려고 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꽤나 관능적인 시각으로 표현했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코레조도 부활하신 주님을 아주 멋진 청년 남성인데다가 배꼽 아래까지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그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과 몸이 너무 매력적이다.

주님을 향해 간청하는 듯한 마리아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긴 금발머리에 황금색 옷을 입고 빨간 망토를 걸친 마리아의 목덜미가 눈부시게 하얗다. 그는 맨 땅에 주저앉아 주님께 간절히 무언가를 청하고 있다. 주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과 그 눈 속에 고인 눈물이 간절함의 정도를 말해준다.

자연은 너무 푸르고 세상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길가에 놓인 삽과 곡괭이가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할 기구를 손에 잡지 않으신다. 곧 지상에서 떠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역사에서 구원의 사역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리라.

왜 주님은 굳이 사랑하는 마리아가 너무 기뻐 주님께 손을 대려는 것을 제지하셨을까. 나를 만지자 마라, 단호한 주님의 말씀에 마리아는 무척 무안했을 것이다.

요한이 전하려는 기쁜 구원의 소식은 하늘에 계시던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를 대속하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다음 본래 오셨던 하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구조 – 그러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과 똑같이 함께 먹고 마시고 손잡고 어깨 걸 수 있었지만, 이제 그 소임을 다 하시고 부활하신 몸은 본래 그랬듯이 인간과 동일하지 않은 존재,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 아닐까. 마리아는 땅을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을 가리킴으로 신과 인간의 근원이 다름을 드러낸다.

오랫동안 문자에 갇힌 교조적 기독교를 역사 비판적 해석을 통해 해방시킨 진보 기독교는 끊임없이 이 질적 차이를 허무는 방향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학은 인간학이며 초월적 그리스도보다는 역사적 예수에 더 끌리게 된다.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서의 메시아는 결국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배우고 따라야 할 위대한 스승이 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역시 진보 신학의 큰 틀은 마침내 자유주의 신학의 그릇된 귀결점에 도달하는 것 같다.

나를 만지지 마라, 부활절기 마지막 주일을 맞아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의 말씀이 마음속에서 돋아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는 너희와 다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가 해소된 21세기, 이 위에서 기독교는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마리아에게는 그러시지 않았겠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는 주님의 진노가 섞인 음성으로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