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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3. 요한나 고흐 봉어, 반 고흐 미술관 전시 사진, 1909년 경, 암스테르담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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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0년 09월 12일 14시 29분 59초

<2020.9.13. 주보 그림>
요한나 고흐 봉어, 반 고흐 미술관 전시 사진, 1909년 경, 암스테르담
오늘 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세계 최고의 미술가로 역사에 남은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늦깎이 화가로서 시대와 화해하지 못한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작품은 딱 하나였다. 그만큼 그의 삶은 가난에 찌들었으며 고단했다. 그래서 고흐의 작품엔 모델이 거의 없고, 돈 안 드는 대상들을 그렸다.
그림으로 부자가 되지는 못해도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려면 기본적인 비용은 있어야 한다. 집‧화구‧물감‧먹을 것 등…. 수많은 예술가와 지성인들이 여기에 걸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현실은 그만큼 냉혹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고흐가 화가의 길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동생 빈센트 테오의 헌신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테오가 없었다면, 있었다 해도 전혀 팔리지 않는 그림만 그려대는 형을 끝까지 도와주지 않았다면 역사에 고흐는 없다. 고흐는 테오에게 짐짝만 되는 자신이 부담스러웠고 결국 자살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결혼 후 2년도 안 되어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정말 황당한 사람은 순식간에 한 살배기 아들(테오는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었다)과 단 둘이 남은 당시 29세였던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어였다. 고흐는 생전에도 지독히 속을 썩였는데, 남편이 가정보다도 형을 돌보느라 생활이 늘 쪼들렸는데, 이제는 남편마저 잡아갔으니(?) 요한나에게 고흐는 웬수같은 시아주버니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고흐의 작품에 감동하고 그의 고뇌와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그 웬수같은 고흐를 위해 그림을 어렵게 보관하고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출판하고 자비를 들여서 고흐 전시회를 연 요한나 덕분이다.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가 없었을 것이고, 요한나가 없었다면 고흐의 작품은 모두 쓰레기가 되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의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고흐를 사라지지 않게 지켜준 테오와 요한나도 고흐 못지않게 내 눈에 잡혔다. 위인의 뒤에는 반드시 어둠 속에서 손발 다 닳도록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오늘, 나의 테오, 나의 요한나를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