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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3. 렘브란트, 탕자 돌아오다, 262*205cm, 1669년, 상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쥬 미술관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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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1년 01월 23일 19시 32분 50초

<20210103 주보 그림>

렘브란트, 탕자 돌아오다, 262*205cm, 1669년, 상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쥬 미술관 

너무 유명한 그림이고 여러 번 인용했기에 전체적인 설명은 줄이겠다. 화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렘브란트가 거의 생애 말년에 그린 작품이다.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탕자를 자기 자신으로 그렸다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오늘은 탕자에게만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아들을 기다리다가 눈이 짓무른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미운 아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떠날 때 주었던 유산은 어찌했느냐고, 왜 이런 몰골이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말없이 그를 안아줄 뿐이다. 풍요로운 아버지와 아무 것도 없는 아들이 한 화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들은 무릎 꿇고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그의 얼굴은 비쩍 말랐고 머리카락도 대부분 탈모 될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 이 고난은 누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후회와 아픔이 사무쳐온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바싹 여위였고 옷은 누더기이며 몸에서는 아마도 냄새가 풀풀 났을 것이다. 

멀고 먼 길을 걸어왔건만 제대로 된 신발이 아니다. 누가 버린 신발인데다가 거의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낡았고 한쪽은 이미 발에서 벗겨져 있다. 인격‧신뢰‧외모‧능력 등 모든 점에서 아들로서의 자격은 벌써 박탈된 상태다. 고매한 집안의 아들로서 적합한 것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그래서 이런 뜨거운 포옹의 원인은 온전히 아버지의 용서요 사랑이다. 이것이 은혜다. 

특이한 점은 거지같은 몰골임에도 탕자의 옆구리에 차고 있는 작은 칼이다. 렘브란트의 작품에는 이런 칼이 자주 등장한다. 탕자의 칼은 집을 나갈 때부터 지닌 것이라고 본다. 다른 모든 것은 다 팔아먹었지만 자신의 신분-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표시하는 이 칼만은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자신의 정체성-이것이 그를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고, 그가 이런 몰골에도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었다. 

탕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우리, 우리는 오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 존재의 근원에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칼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가, 진정한 새로움은 바로 거기서 가능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