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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주보 그림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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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1년 06월 13일 11시 57분 13초

<2021.6.13. 주보 그림>

불꽃 김종태

8년 전, 주민교회 부임해서야 들은 낯선 단어는 광주대단지사건(1971년)과 김종태(1980년)라는 이름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전혀 모르던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매년 김종태열사를 추모했다. 교회서 추모식을 진행하기도 했고 청년들이 광주 망월동까지 내려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정신을 기리곤 했다. 지금이야 민주세력이 세운 정부지만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정부는 군사독재 권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정치 행태도 민주‧생명‧평화‧정의에 반(反)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했고 자연히 교회가 참여해야 할 행사나 집회도 많아서 사실 우리 교교회는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러니 김종태열사를 추모하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래 전부터 해오던 행사라는 형식적인 측면이 있었고 또는 대의는 맞지만 가슴으로 뜨겁게 와 닿지는 않는 그런 행사였다. 얼굴 한번 본 적도 없고, 생전에 어떤 인간적 관계를 형성한 것도 아니고, 이미 40년 전 일이고, 그 사이 5.18광주민주화운동도 역사‧재판‧영화와 문화 등 다양하게 재구성되어 많은 부분 익숙해져 있었다. 김종태열사는 바로 그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1980년 6월 9일 분신을 감행했다.

작년에 김종태열사 산화 40주년을 맞이하여 김종태추모사업회가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우리도 작년에 교회서 그 책을 나누고 읽으려다가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올해도 온전한 추모 행사는 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김종태추모사업회는 오늘 광주 망월동의 열사 묘소에서 추모하고 우리 교회는 이 추모식을 후원하면서 오늘 주일예배를 기념예배로 드리고 있다. 내년부터는 관련된 몇 단체가 협력하여 보다 뜻깊은 추모 행사를 준비하려고 한다.
김종태열사의 삶을 정리한 책 <너는 불꽃이었다, 햇살이었다>를 읽으면서 스물세 살(58년 개띠)이라는 아주 어린 청년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었다. 영화 ‘세븐데이즈’(2007년 개봉, 김미숙‧김윤진 주연)는 자신의 딸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범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도 사치라고 여긴 피해자의 엄마가 살인자를 무죄로 만들고 출소한 범인을 납치해서 살해한다. 죽이는 방법이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럽다는 화형이었다. 교수형도 두려운데 화형은 그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두려운 형벌이라는 것이다.
정말 아직은 어린 스물세 살의 청년이 그냥 욱하는 감정으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그 무서운 화형을 스스로 당한 것인가? 41년 전, 이화여대 앞에서 분신을 결행한 김종태 청년은 5일 동안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고통 받다가 14일에 소천한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목숨이 끊어졌다면 덜 아팠을 텐데, 이 5일이 5년 이상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진다.

주민교회에 부임하니 매년 청년회가 중심 되어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년 지나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고 청년하고는 아무 연관도 없고, 이미 60대인 고인을 왜 청년들이 추모해야 하느냐고…, 추모식을 준비하는 청년들 입장에서는 매년 똑같은 형식으로 추모하기도 그렇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자니 마땅치도 않아 꽤나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그러니 정 교회가 김종태열사를 추모해야 한다면 58년 개띠를 전후하여 열사와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세대가 준비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40년 전 김종태는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정권의 서울시 미화사업에 따라 청계천, 미아리, 상계동 등의 빈민들이 당시 허허벌판 광주군으로 떠밀려 와서 살았다. 김종태 집도 서울 미아리에서 살다가 성남 수진동으로 이사 와서 천막치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반에서 줄곧 1등을 했지만, 결국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다. 힘겹게 노동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연세대 신학과 학생이 운영하는 제일실업이라는 야학에 들어가게 되고 기독교 신앙과 검정고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는 1979년에 이해학전도사님을 만나서 주민교회에 정식 교인으로 등록한다. 요즘 우리 청년들처럼 교사‧성가대‧식사‧청소 등 여러 가지 교회 봉사를 하면서 교인들과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면 더욱 교인들의 삶에 녹아들고 그의 죽음에 애틋하겠지만, 20대 초반 청년이 노동하면서 야학에서 공부하여 검정고시 보면서 노동현장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노동법 등을 공부하면서 교회 봉사까지 잘 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한 바람이다. 그는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수는 없었지만 주민교회 목회자인 이해학전도사님에게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분신을 결심하고는 이해학전도사님에게 유서를 쓰고 유언을 맡겼다.
김종태는 참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심성이 따뜻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삶과 생각 바탕에는 기독교 신앙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전태일 열사도 노동운동가로만 기억하지 그 바탕에 있는 기독교 신앙인의 정체성을 일반 노동운동권이나 사회 개혁가들이 일부러 간과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서울 전태일기념관에 가보면 전태일열사가 정말 신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노동자 동료들에 대한 사랑과 그 헌신의 마지막 행위로서의 분신이 모두 신앙적 결단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보다도 전태일 열사를 존중하고 따르고자 했던 김종태 열사도 제일야학과 주민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결단하였다.
위의 책에 수록되어 있는 그가 지은 서시를 보면 너무나 명백하다.

종태의 서시 : 불씨
일어나라 아들이여 / 때가 가까웠으니
횃불을 들자 믿는 이여 / 주의 길을 예비하라
격랑하는 검은 물결 / 믿음으로 잠재우리
두터운 피의 장벽 / 큰 빛으로 허물자
넘어져도 일어나라 / 주가 함께 하시리라
내 가슴속 더운 피에 / 주가 함께 하시리라
온 누리에 빛을 전할 / 불씨가 되리라

우리는 왜 전태일을 기억하려고 하는가, 광주의 영령들을 기억하려 하는가, 신앙의 순교자들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가, 왜?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을 구하고 사소한 편리함과 재미와 탐욕에 이끌리는 우리의 삶에 이들이 자꾸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눈물 글썽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면서 그 뜨거운 몸으로 우리에게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느냐고 주먹질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제는 귀를 막고 쳐다보기도 싫어하면서 자기 이익을 구하고 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고뇌와 호소를 저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보다 훨씬 가깝게 따라간 분들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이로 보면 김종태열사는 이미 60대이고 우리 청년들을 한번 본적도 없기에 아무 관련은 없지만, 우리 청년들과 같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김종태라는 청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의 청년으로서 무엇을 고민했는지, 무엇을 위해서 밤을 새우고 가슴 아파하고 처절하게 싸웠는지, 왜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행위를 한 것인지 자꾸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외면하고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이 학업과 노동과 불안한 미래로 많이 지쳐있어서 안쓰럽지만 그럼에도 40년 전 김종태가 청년의 나이에 자기 몸에 불을 붙이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로 외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두고두고 고심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