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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10. 주보 그림> 김대건 신부의 참수, 르 펠르항 1906년 4월 5일자 표지 주민교회 (jumi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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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2년 07월 12일 15시 50분 28초

<2022.7.10. 주보 그림>


김대건 신부의 참수, 르 펠르항 1906년 4월 5일자 표지


가톨릭과 개신교는 형제이면서 미운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130년 동안 구교와 신교 사이에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유럽을 도륙했다. 한 세기 이상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를 통해 얼마나 깊은 증오가 겹겹이 쌓여 있겠는가. 5백년이 지난 지금 가톨릭과 개신교는 신앙의 형제로서 잘 지내고 있다. 성남에서도 개신교 목회자들과 천주교 사제들이 가끔 만나서 대화와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천주교에 대해서 개신교가 갖는 아쉬움도 있고 불쾌함도 없을 수는 없다. 또 부러운 부분도 있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 천주교에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열등감(?) 중의 하나는 천주교는 전래 당시에 조선정부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냈고 그 후에 들어온 개신교는 박해의 시대를 비켜나서 조선 왕실과 비교적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 순교자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이 순교자 유무의 역사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개 과정에 보이지 않는 차이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5일은 한국 최초의 공식 사제인 김대건 신부(1821~1846년)의 순교 기념일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6세인 1836년에 프랑스외방전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 다음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845년 25세에 한국인 최초 신부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는 1년 동안 조선으로 돌아와 신부로 활동하다가 1846년 6월에 조선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지도와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전달하려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9월에 지금의 한강대교 북단 새남터에서 참수 당한다.


순교 60주년을 맞아 프랑스 잡지 르 펠르항 표지에 참수 장면이 실렸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는 아직 동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조선‧중국‧일본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형 집행인들을 중국인 복장으로 그렸다. 아직 앳된 얼굴의 김대건신부는 무릎을 꿇고 머리가 기둥에 묶여 있지만, 고개를 당당히 들고 두려움 없이 무서운 칼을 받아낼 자세다.


김대건신부는 영어‧스페인어‧라틴어‧중국어‧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엘리트였기에 조선정부도 천주교만 버리면 벼슬도 주고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순교의 길을 선택한다.


1846년 9월 16일 그는 순교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신앙은 대개 몸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이 세상 살면서 행복하고 죽어서도 천국 가기 위해 믿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유는 하나다 ;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인생과 생명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참혹하게 죽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하나 뿐인 내 목숨을 기꺼이 내 놓는다. 그것도 끔찍한 고문과 칼로 목을 치는 참수형의 공포 앞에서도 신앙을 포기 하지 않는다. 오늘 내 신앙은 이렇게 순전히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덕분에 가능한 은총이다.


기독교 신앙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