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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26. 주보 그림>
마르크 샤갈, 방주 창문으로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노아, 1931년
하나님께서 주민교회를 세워주신 지 50년을 맞아 감사와 전망의 축제를 연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기 위해 30년 전부터 주민생협을 만드는 등 환경운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럼에도 지구는 이제 공멸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끔찍한 지구 파멸의 날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다.
교회는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세상을 향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호소하고 선언하기 위한 모임이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구원의 방주다. 노아의 방주는 품이 넉넉하다. 노아 식구들만 태우는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규모가 크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식구처럼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함께 태우라고 하셨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는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구원은 인간의 전유물인 양 착각한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생태계 파괴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자연은 인간의 정복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고 돌아가고 안주해야 할 생명의 보금자리이거늘 그 똑똑해진 인간이 벌인 일이라는 게 자기 보금자리를 자기 손으로 마구 파괴해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우리에게 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 한가롭기만 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아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영혼의 감각이 무뎌진 세상이다.
50주년을 맞으면서 주민공동체는 생명의 회복이 첫 번째 사명임을 되새긴다. 우리가 노아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이미 들이닥친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진 세계를 흔들어 깨워야 한다. 아직 가느다란 빛줄기가 남아있을 때 절실하게 몸부림쳐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비둘기를 보내 주시리라.
<2020.11.29. 주보 그림 설명>
마르크 샤갈, 방주 창문으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노아, 63.5x47.5cm, 1931년
세상에 죄가 가득 찼을 때, 더 이상 표면적인 정화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죄가 충만했을 때,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제 2의 창조를 단행하신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심판을 의미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혹독했다. 온 세상을 물로 다스리시는 완벽한 심판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존재는 없었다.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약속의 가정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다-노아!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샤갈(1887~1985년)은 종교와 고향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샤갈이 노아를 그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비가 그쳤다. 하늘에서 빗물을 쏟아 붓는 것 같던 홍수가 40일 만에 멈춘 것이다. 그동안 한정된 공간 안에 갇혀있던 노아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니 또 얼마나 서둘러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이 있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까. 그러나 노아는 성급한 마음에 자신의 인생을 내맡기는 청춘은 아니었다. 비가 그쳤다고 곧바로 뭍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물이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하루빨리 방주에서 내려 땅을 밟고 싶은 간절함을 날려 보낸다. 이제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비둘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배 안이 아니라 창공이요 나뭇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감격스러운 은총의 자리에 노아뿐 아니라 며느리와 그 자식이 동참한다. 그들은 대를 이어 이 체험을 간직하고 공유하고 전승할 것이다. 신앙은 기억(보관)-공유(수평적 증언)-전승(수직적 증언)의 과정을 지녀야 한다. 이 과정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교회다.
이 자리에는 사람과 함께 동물도 동석한다. 창조가 본래부터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삶이듯이 구원 또한 우주 만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자신이 자라난 고향 러시아에서 자주 보았던 닭과 염소를 등장시켰다.
구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산업사회를 지나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가, 육체의 고향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고향을 파괴한 현대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향 잃은 시대에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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