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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50주년준비 선교과제 찾기 - 생명환경선교 전문가 강연 주민교회 (juminch)
2022년 07월 23일 23시 17분 54초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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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올린 시간 : 2022년 07월 23일 23시 17분 54초

창립50주년준비 선교과제 찾기 전문가 강연 

 

주민교회 새로운 선교비전을 위한 제언 - 생명선교 

 

때 : 2022.7.17.(일) 1:30pm  

 곳 : 주민교회  

하동근원장(판교생태학습원) 

 

기후위기와 생명선교 

 

  주민교회가 지난 5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50년의 선교방향을 모색하는 1년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잘 모르지만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하느님의 섭리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우리 집사람도 그걸 느끼는 듯하다. 강연준비를 하고 있는지 몇 번이나 불안한 점검을 당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과거 50년과 앞으로의 50년이 어떻게 다르고, 그래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가일 것이다. 지난번 얘기에서 주민교회 과거 50년을 꿰뚫는 키워드가 ‘민중’이었고, 국면의 전환에 어울리는 대응을 멋지게 해냈다고 했다. 그런데 앞으로 50년의 키워드는 ‘지구시민’이 될 것이고, 그에 맞는 대응은 생명선교가 필요할 것으로 제안했었다. 좀 생뚱맞은 느낌이 드신 분들이 상당히 계셨을 것이고, 적어도 그림이 그려지셨던 분은 소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도 주민교회가 독자적으로 펼쳐낼 생명선교의 그림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명선교를 개 교회 수준에서는 해오지 못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JPIC) 운동이나 기장생태공동체운동본부, 예장녹색교회협의회,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등 교단이나 단체차원에서의 활동이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생명선교로의 전환은 우리에 맞는 환경신학(eco theology)에서부터 생명선교 방법, 프로그램개발 등 쉽지 않은 일들을 해야 하고, 어쩌면 민중선교보다 힘든 작업이 될 수 있다. 지구기후위기시대의 가장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생명체는, 다시 말해 오늘의 민중은 지구별과 지구시민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구가 왜 이렇게 질식의 위기까지 내몰렸는지, 언제부터 이 위기를 느끼고 해결을 위해 세계가 움직여 왔는지, 교회는 어떻게 참여하였고 그 신학적 입장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교회가 이 문제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주민교회 생명선교의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왜 기후위기인가? 

 

일단 기후위기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지구가 뜨거워졌다는 얘기이다. 왜? 화석연료를 태우면 에너지를 얻지만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남는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통한 운송혁명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증기기관을 움직이기 위해서 석탄을 태운다. 이때부터 지구가 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1도 상승했다. 그런데 NASA 가 작성한 기후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에 지금보다 1.5도 상승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원래 기후변화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자연현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 사람에 의한 기후변화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움직이면 다시 지구 스스로 기후조절시스템으로 자연적 기후변화로 되돌릴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1.5도 더 상승한다면? 그냥 땀 좀 더 흘리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아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후가 1.5도 올라가면 해수면이 뜨거워진다. 태풍이 강해지고 자주 발생한다. 가뭄이 계속되어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꺼지지 않는다. 호주산불은 6개월간 지속되어 한반도 면적의 85%를 태웠고 5억 마리의 야생동물이 죽었다. 미국서부 산불은 미국 서부에 마른번개들이 내리치면서 8,000개의 산불이 연이어 나타났다. 거기다 기후패턴이 불안정해지면서 폭우와 홍수가 자주 나타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 등 전염병의 발병회수가 예년 평균보다 5배 이상 발생하고 있다. 빙하들이 녹고 있다. 히말라야 빙하는 지구 인구 40%의 식수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기후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이 북반구의 동토지대이다. 지금은 빙하나 얼음에 덮여 있지만 북반구 온도상승으로 동토가 녹기 시작한다. 동토바닥에 얼어 있는 생물들은 이산화탄소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이 녹게 되면 지금까지 인류가 발생시킨 이산화탄소 양보다 많은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게 된다. 거기에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효과가 23배(혹은 30배)인 메탄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어 지구나 인류가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1.5도 상승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할 틈이 모자란다. 유튜브에서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 투모로우, KBS의 ‘불타는 지구’, 조천호박사의 기후변화 관련 유튜브들을 찾아  보시기 바란다. 

 

그래서 이 지경까지 가지 않으려면 1.5도 상승에서 막아야 한다고 유엔기후전문기구인 IPCC가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 IPCC는 기후과학자들이 각국 정부를 설득하여 만든 기구이다. 정치를 모르는 학자들이 위급한 지구현실을 보고 움직였던 거다. 이들이 얼마나 보수적인 집단인지 그들이 내는 보고서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발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어선택도 합의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97% 확실해도 ‘~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표현된다. 요즘 한국의 언론은 30%의 가능성만 있어도 팩트로 단정하여 보도하는 현실과 비교되지 않는가? 지금 기후위기 문제를 풀어보려고 가장 애쓰는 집단이 이 IPCC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서 얘기되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기후변화 얘기를 한번이라도 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은 손들어 보시라. 그래서 미국 부통령이자 유명한 환경운동가인 엘 고어는 그의 저서와 영화 제목을 ‘불편한 진실’이라고 불렀다. 이 기이한 현상을 조지 마셜이라는 기자는 ‘기후침묵’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이 외면하려하고 동의하지 않으려는 현상을 파헤쳤고 그 결과를 “기후변화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냈다. 기후변화를 알려면 심리학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아무튼 기후변화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해 다니기만 해서는 곤란하고 도덕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블룸버그 사는 현재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여 자신의 사이트에 중계하고 있다. 소위 탄소시계(dioxide clock)이다. 이 시계에 나타난 현재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414ppm이다. 이 농도는 2040년에 450ppm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증기기관차를 석탄을 때서 움직이기 전, 즉 산업혁명 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280ppm이었다. 그런데 1959년 측정했을 때 318ppm이었다.  지난 65만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가 300ppm을 넘은 적이 없었다. 65만년 동안이다. 200년 만에 변화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즉 자연적 기후변화의 한계는 300ppm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지점을 넘도록 만든 것은 인류인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50년 안에 탄소시계가 800ppm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NASA는 추정한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이다. 말 그대로 폭발이다. 

 

기후 위기가 과감하게 진행된 데에는 철학과 교회의 뒷받침이 있다.  

 

기후위기는 철학의 위기라고 한다. 매우 거칠게 얘기하면 잘못된 철학이 자연을 망가트리도록 부추겼다는 얘기이다.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서 자연을 착취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다. 그래서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이법(logos)를 따라야 하는 존재였다.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고 가뭄이나 홍수가 빈발하면 인류에게 주는 자연의 경고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나무 한그루 베는 일을 두려워하고 떨었었다. 커다란 바위 앞에선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데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 과학은 베이컨에 의해 시작된다고 한다. 그는 “너희들은 대지를 지배하라”고 했는데, 지배하고 이용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바라보는 “도구적 자연관”을 내세웠다. 그는 과학의 목적이 자연의 원리를 알고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을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이라고 말한다. 

 

갈릴레이부터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외적이고 스스로 성취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자연을 기술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로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변화가 극적으로 이뤄진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먼저 떨어진다는 1,000년이 넘도록 진리로 여겨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실험을 통해 뒤집는다. 실험을 통해 증명될 수 없는 것은 가짜라는 실증주의의 기반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연장하는 것(res extansa)과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으로 구분하여 인간의 본질적 속성(자연)인 육체까지도 연장하는 실체라고 극단적으로 파악한다.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정신이 없는 것은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자연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자연도 감정이나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고 동정하고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나 정신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육체의 언어인 감각이나, 정서, 욕구는 이성에 의해 무자비하게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근본적으로 변경될 수 있는 무엇으로 되었다.  

 

베이컨의 과학과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과 연장하는 것의 구분으로 서구 철학은 “이성에의 광적인 확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성만이 믿을 만한 것이 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 과학과 철학은 엄청난 근대문명을 만들어 내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구의 자원은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고, 그것의 자정능력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근대 과학, 철학은 전제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 기반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근대철학이나 과학만이 생태계 위기를 유발한 것이 아니었다. 1967년 린 화이트 주니어라는 학자는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작은 논문을 사이언스지에 발표하는데 ‘지배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말씀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고 기독교 신학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과적으로 근대과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이 어울려 자연착취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지구에 대한 인간의 대응방식이 커다란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60대이다. 1962년에 레이첼 카슨은 봄이 왔는데도 새들이 오지 않는 현실을 고발한 “침묵의 봄”을 발간한다. 이 책은 농약들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지만 토양을 오염시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1972년에 로마클럽은 지구자원이 유한하며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100년 안에 성장이 멈추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성장의 한계”를 발표하여 세계를 경악시킨다. 지구자원과 지구의 오염 흡수 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발견은 지금까지의 발전방식뿐만 아니라 철학과 윤리학까지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위기의 내용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된다. 즉 아무리 자원을 퍼내고 쓰레기를 버려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지구도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한 단체가 WCC이다. 1974년 ‘교회와 사회의 대화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7년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 보고서에 등장한다. 노르웨이 수상이었던 브룬트란트가 발표한 이 보고서의 취지는 지구위기의 문제는 우리 공동의 문제다. 이제 국가나 민족을 넘어서는 지구시민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문제해결도 지구 전체 식구들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기계론적 근대과학과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의 근대철학, 그리고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할 대상으로 해석한 신학까지 어울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극적으로 변화시켰고, 결국 하느님 창조의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이 위기는 철학이나 신학의 문제이었고, 문제 해결의 시작도 철학과 신학의 전환을 통한 반성과 회개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왜 생명선교인가? 

 

  기후변화를 1.5도까지 묶으려는 노력은 지구시민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1992년 리우유엔환경개발회의에는 178개국 정부대표 8,000명, 167개국 7,892개 민간단체 대표 1만 명, 취재기자 6,000명, 대통령(수상포함) 115명이 참석한다. 역대 최대이다. 파리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1)에는 3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면서 최대 규모가 되었다. 뭔가 해결에의 기대가 느껴지고, 지구시민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산화탄소 증가추세에는 거의 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제정치나 국가단위의 노력에는 국가마다의 정치적 한계가 분명하다. 경제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기업이나 국가, 시민들의 탈탄소를 기대하기 어렵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명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이뤄져야 가능하다. 이때 생명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올해 환경의 날 기념사에서 UNEP Andersen 사무총장은 ‘우주에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고, 각각의 은하계에는 수천억 개의 항성이 있다,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는 지구뿐이다, 단 하나뿐인 지구! (Only One Earth). 그런데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세 개 반의 지구가 더 필요하다. 1972년의 주제를 그대로 50주년인 올해의 환경의 날의 주제로 선택한 것에서 기후문제 해결의 속도가 제자리걸음임을 알 수 있다. 수백조개의 항성들 중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생명체 지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지 않는가? 바로 그 지구가 그 하나뿐인 생명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생명선교 신학은 그 소중한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stewardship)로서 인간을 책임을 가정한다.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창세기 1장을 창조 질서를 ‘지키고 보전(Integrity)’하라는 의미로 읽는다. 사람중심의 창조질서에서 우주차원의 창조질서로의 전환이다. 그것이 생태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탐욕, 이기주의, 인간중심주의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 운동은 1983년 WCC 뱅쿠버 총회에서 채택되는데 인권, 불평등, 반민주 등의 정의와, 전쟁 해결의 평화, 그리고 환경문제 해결의 창조보전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이념이다. 이 이념은 1988년 노르웨이에서 “인류는 피조물의 일부로서 다른 피조물과 연대하고 그들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JPIC는 WCC생명선교의 중요한 방향전환으로 1990년 WCC서울대회를 기점으로 창조보전이 정의와 평화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상락 권사의 발제에 나오는 주민교회 규약에도 JPIC가 중심개념 임을 선언적으로 고백하고 있어서 주민교회 생명선교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렇게 전환된 선교신학을 칼 하르텐슈타인 ‘하느님의 활동’(actio Dei)이란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고 하느님 선교(missio dei)신학이라 부른다. 과거 선교는 ‘교회중심선교’였는데, 하느님 선교에서는 ‘선교중심교회’로 전환 된다. 선교 중심에 하느님의 활동이 있다는 생각이다. 신학의 전환이 기후변화에 직결된다는 생각에서 여성생태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기후 변화는 신학적 문제이다”라고 했다. 

 

신학을 바꾼다고 기후문제가 직접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기후문제를 해결할 최종방안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일들은 이제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 사회주의 이론가들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핫한 사상가인 슬라보예 지젝에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 이탈리아의 아감벤 등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내면의 혁명, 역동적인 회개와 전환의 모델을 바울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회개하면 목숨을 버리면서도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성령과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요엘 2:12-13) 

생명선교의 기본정신은 비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립보서 2.1~8) 비우고, 낮추고, 복종하고. 근대철학의 주체성 추구 차원을 넘어서는 자유와 복종의 변증법이 나타나고 있다. 니체의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넘어서는 지평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전문) 

 

이것이 회개의 내용입니다.  

이런 회개가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선교신학이 가능하겠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주민교회 앞으로의 50년 선교방향을 고민하는 문제는 주민교회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외부적으로 교회의 신뢰하락이라는 교회 일반의 문제가 있다.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그 신뢰성에 큰 타격을 안겼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변화된 환경에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주민의 지난 50년은 민중과 함께하는 민중선교로 민중교회의 성공적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민중선교가 맡아왔던 많은 일들을 공공이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시대 대표적 민중인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들에 대한 역할은 외국인복지행정이 담당하고 있다. 그 외에도 복지행정이나 노동조합 등이 빈민이나 노동의 문제를 충분하지는 않지만 감당해가고 있는 중이다. 선교의 대상이 흐려지거나 약해져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효과 있는 선교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주민교회는 지속가능한 교회인가를 물어야하는 현실 앞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은 지구라는 생명체라고도 할 수 있다. 창조의 보전이라는 선교과제는 인류를 포함한 전체 지구구성체를 해방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JPIC 이념처럼 사람만이 선교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는 노아홍수에서처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개 교회 차원에서 생명선교를 전면에 내세우고 전적으로 밀고나간 경우는 흔치 않아 보인다. WCC 자료를 보다가 남아공의 어떤 교회가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료를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주민교회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성령이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지난 50년 사람들의 힘만으로 그 어렵고 고단한 일들을 감당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더구나 일반적인 사업이 아니다. 우리의 기획과 계산으로만 비전을 꾸리고 밀고 간다면 감동을 주기 어렵고, 시니컬하고 부유한 마음들을 주민교회로 불러내기 어려운 일이 되기 쉽다. 자기를 비우고 이웃들의 종이 되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부터 바꿔야하는 일이다. 설탕만을 너무 먹어 문제인 아이가 있었다. 어미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간디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이 간디였기 때문에, 간디선생이 얘기하면 말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디선생은 15일 후에 다시 데려오면 아이에게 끊으라는 말을 하겠다고 돌려보냈다. 15일 후 다시 갔고 간디는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과연 그 아이는 설탕을 끊었다. 어미가 물었다. 왜 15일 후였냐고. 간디는 나도 설탕을 좋아하여 즐겨 먹는 중이었다. 내가 설탕을 먹으면서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그 동안 설탕을 끊었다! 

 

기후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업들이 돈 버는 방식을, 국가들이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을, 그리고 우리들 각자가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인 것이다. 엘 고어도 못 바꿨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번 바꿔보는 것이다. 장노님들부터 전 교인이 내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진정성을 가지고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호소하는 것이다. 기후정의 청소년들이 믿고 찾아올 믿음직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기후문제가 신학의 문제고 믿음의 문제임을 솔선해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얼스샷 상이라는 게 있다. 기후변화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대상으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기후변화 노벨상 격이다. 영국 왕실이 2020년 만들어 작년에 첫 회 수상자가 나왔다. 네 개 분야에 걸쳐 시상하는데 각 16억 원 규모이다. 개교회 수준에서 획기적인 기후변화 운동 모델이 나온다면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 기후변화분야는 노벨상에서도 관심을 쏟는 영역이 되었다. 그레타 툰베리는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  

- 주민교회 탄소발자국 관리하기 

교인 각 가정의 전기요금, 가스요금, 수도요금, 승용차 연료 등으로 탄소발자국을 계산하고 발자국 줄일 목표를 설정하여 전체 감축량을 매주 계산한다. 

 

- 기후행동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이자 

크레타 툰베리 같은 기후 활동가를 길러내자. 

하느님의 창조보전 사업의 청지기(stewardship)들을 양성 

 

- 기업과 ESG를 매개로 네트워크를 건설하자 

 기업의 탄소배출량은 전체배출량의 64%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ESG 경영을 유도해내자 

 

- WCC의 JPIC, IPCC, UNEP 등과 사업연계 하기. 네트워크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기후변화 문제는 세계기구와의 협업이 필요한 사업이다. 

 

- 허브(연구소) 역할 

이런 사업들을 하려면 전문 기관이 필요하다. (예: 주민기후행동연구소) 돈 많이 들어갈 일이 아니다. 신학, 환경공학, 기후변화, 환경교육 등의 분야에 석사급 대학원생을 객원 연구원으로 두고 1~2명의 상근 인력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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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창립50주년준비 선교과제 찾기 - 생명환경선교 전문가 강연 주민교회 2022-07-23 560
285 20220717 한맹순권사‧이필용성도 추모 기도문 주민교회 2022-07-23 548
284 2022년 전반기 감사수기 - 심재구 집사 주민교회 2022-07-23 537
283 2022년 전반기 감사수기 - 김명자A권사 주민교회 2022-07-23 545
282 2022년 전반기 감사수기 - 김용경집사 주민교회 2022-07-05 537
281 2022년 전반기 감사수기 - 김명자B권사 주민교회 2022-07-05 542
280 20220626 고 이상윤 권사 추모 기도 주민교회 2022-06-26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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