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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학 칼럼(2)> 통일 선물 안고 고향에 가고 싶어 . 주민교회 (juminch)
2015년 02월 21일 00시 00분 00초 545
며칠 전에는 고향 친구가 찾아와서 정담을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6.25때 빨치산에 의해 강제로 등짐을 지워 지리산으로 올라가 행방불명이 된 뒤 형제들이 고아같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가슴에도 나와 똑같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강같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순창이다. 고향을 떠나 온지 40년이 되어도(지금은 60년이지만) 내 가슴 속에 어른거리는 고향은 순창 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들을 다녀 보아도 그 곳은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이 아니었다. 봄 아지랑이 필 때 종달새 지저기 던 밭두렁에는 노란 아순개 하얀 삐삐 피어나는 곳. 우리는 그 언덕을 두런두런 얘기하며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나는 100여 년 전 선배들이 흰옷 입은 대열로 전봉준 장군을 따라 죽창 들고 개벽세상 꿈꾸던 순창 벌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진다. (전봉준 장군은 회문산에 은신하다 주민의 신고로 잡혀 처형되고 신고한 문씨는 동네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최익현선생이 70 노구에도 의병들을 이끌고 밭이랑을 넘나들며 싸움에 임하다 체포되어 대마도에 가서 물도 안마시고 버티다 순직했다는 것은 순창의 자랑이다.

임실 삼계를 돌아 동계 적성을 거처 우리 동네 화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 물은 영혼으로 흐르는 시원한 줄기이다. 그 물 속 모래를 밟아 모래무지를, 바위틈을 더듬어서 쏘가리나 징검사리를 잡았다. 쏘가리란 놈에게 쏘여서 따끔거리던 손바닥의 감촉이 되 살아나는 듯하다. 어른들은 낚시를 던졌고, 우리는 어항을 놓았다. 여름에는 투망을 던졌고, 겨울에는 어장을 파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물을 품고 물고기를 몇 가마 씩 잡아 나누었다. 어찌 그 때 먹었던 무 조림한 매운탕 맛을 잊으리오. 어른들이 은어가 올라왔다고 좋아하던 표정들을 잊을 수 없다.
그 물이 마지막 흘러 하동에 가서는 큰 배로 변한다는 동내 형들의 말을 믿고 나는 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들어 몰래 띄웠기에 책 없이 공부를 하던 학기도 있었다.

나는 6년간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이 강을 건너야 했다. 겨울에는 짚 한 단을 갖고 얼음을 깨고 건너가서 그 짚으로 불을 지펴 발을 녹이며 학교에 갔고, 여름에 홍수가 났을 때는 책을 머리에 이고 헤엄을 치다 몇 번씩이나 죽을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5 리나 떠내려 간 적도 있다. 목숨을 걸고 건넜던 강이었기에 섬진강은 나에게 목숨 같은 것이었다.

 

내 고향 순창은 큰 산은 없어도 지리산이 끝나는 노령산맥 치마자락에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쳐 있다. 어린 나이지만 내 뇌리에 가장 크게 각인시켜 준 것이 봉화불이다. 아마도 6.25직전 이었으리라 그 때는 모든 산에서 봉화불이 올랐다. 봉화가 오르면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우리 동네 작은 뒷산에 올라 보면 물 건너 쌍치 인계 복흥 구림면 방면 모든 봉우리와 곡성 쪽의 산 마다에도 봉화가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봉화가 오르면 어른들은 수근 거리며 불길한 그림자를 짓기도 하고 가슴을 설레기도 하였다. 나는 그 봉화불의 뉘앙스를 운명처럼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 때 호를 봉화(烽火)라고 지어 사용한 적도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이다. 공중 높이 B-29비행기가 몇 차례 뜨더니 곧 빈번해졌다. 얼마 있다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퍼졌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막내 삼촌이 군에 끌려가면서 비로소 전쟁을 실감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무 밭에 소매(소변)를 주러 가실 때에 따라 나갔다가 마침 미군기가 우리 동네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다리인 방갓다리와 핑경다리를 부수기 위하여 기관단총으로 공격하는 현장에 있었다. 나는 내가 입은 조끼를 군복 천으로 기웠기에 혹시 나를 적군으로 알고 쏠까 봐 소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 머리 위로 탄피가 우두둑 우두둑 떨어져 기겁을 했다. 멀리 원 다리(옛날 원님이 통치하던 곳이어서 붙인 이름)를 부술 때에는 우리 동네 뒷산에서부터 비행기가 발진하여 폭탄을 퍼 부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방공호에 들어가 있고 한 사람이 망을 보고 있다가 "떨어진다!"고 고함지르면 귀를 막으며 보낸 한나절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 무렵에 우리 동네에서 꽤나 핸섬했던 육촌형이 끌려가서 매를 맞아 죽었다. 어느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형이 파출소 안에서 고문을 당할 때에 한 동네 사람으로 경찰에 있는 이가 팅팅 부어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돼지몰이 하듯 매를 가지로 몰고 다녔다는 말을 전해 듣고도 사람들은 쉬쉬하며 가슴으로만 눈물을 흘렸다.

그 형의 장남은 나와 동갑내기로 친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보다도 사실 빤 듯한 그 형을 나는 너무도 좋아했다. 그의 죽음은 마치 아버지의 죽음같이 어린 내게도 충격이 되었다. 그 형의 묘지는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있었기에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모종의 결심 같은 것을 하며 지냈다. 나중에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말에 의하면 그 형에게 앙심을 품은 친척중의 한 사람이(모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 형을 밀고를 하여 끌려가 남로당 당원인 것을 자백하라고 고문을 받다 죽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으로서 이성이 필요 없는 때이다. 인간이 가진 천사성과 악마성 중에서 악마성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는 때이다. 모든 악마성이 합리화 되는 때가 전쟁이다.

인민군 세상이 되었을 때 나중에는 없어졌지만 처음에는 소를 끌어가거나 곡식을 가져갈 때 해방세상 되는 날 반듯이 보상하겠노라고 일일이 빼앗아 간 것을 치부책에다가 적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대낮에 우리 동네 앞 한길에서 적성국민학교에 공연하러 올라가던 인민군 선전대와 내려오던 국군이 맞부딪혀 불 튀기는 접전을 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인민군들이 급한 김에 호밀밭에다 묻어 놓고 도망간 악기와 따발총들을 찾아내어 경찰에 넘기기도 하였고 간 큰 사람들은 그 사이에도 탄피를 모아 엿을 사 먹었다.

 

밤에는 인민군이 와서 부락에서 갹출한 식량을 등짐 지워 지리산으로 끌어갔고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낮에는 경찰이 와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끌어다가 섬진강 가에 줄을 세워 기관단총으로 갈겼다. 나는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강물에 뻘겋게 물들어 가는 핏빛을. 그 때는 살아 있는 것이 죄가 되던 때였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집 뒤에나 대나무 숲에 굴을 파고 개 짖는 소리만 나면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도 들통 나서 숨을 곳이 못되자 우리 아버님은 몇 사람과 어울려 수수밭에서 비를 맞으며 여름을 나셨다.

할머님께서는 밤마다 비밀스런 몸짓으로 주먹밥을 나르고 새벽마다 목욕재개 하시고 정한수를 떠 놓고 삼신할머니께 빌었다. 그래서인지 큰 삼촌은 장단지에 할미꽃을 이겨 발라서 악성 부스럼을 내어 징집을 면제 받았으며, 막내 작은 삼촌은 군에 입대하여 총상을 입고 제대를 하셨다. 삼 형제가 무사히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났지만 전쟁이 끝난 다다음해에 아버님은 마흔 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내 나이 10살 어머님이 서른 여섯이셨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고 잔치가 벌어지니 동네친구들을 몰고 와 재미있게 뛰어놀다 어른들에게 혼이 나도록 철이 없었다고 우리 어머님의 일기에 기록되어있다. 아버님은 농한기에 어촌을 돌며 비단을 팔아서 많은 빚을 갚고 논을 스무 마지기나 사들인 전설의 남자였다. 피난민들이 봇짐을 들고 행렬지어 가는 신작로 주막에서 항아리로 술을 마시며 “거 미친 사람들 대포가 쏟아지는데 피난을 어디로가!” 그렇게 호탕하시고, 사랑방 이야기꾼이시고, 동네 상여를 이끌며 만가를 선창하신 분이지만 수수밭에서 얻은 기관지병을 이길 수 없었다. 아니 가난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생을 회복 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에 갔으나 교실이 없어 4학년까지는 운동장 수업을 많이 했고 노트가 없어서 땅바닥에다가 글을 쓰며 지냈다. 책만큼은 유네스코가 제작해 준 것으로 쓸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독한 가난이 덮쳐서 처음에는 메밀을, 그 다음에는 도토리를 그 것도 없을 때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긴 생키를 먹여야 했다. 학교에 가서는 점심때는 밥 대신에 미국이 보내 준 우유와 간유를 줄 서서 받아먹으며 공부를 했기에 우리는 친미주의자로 자랐다.

전쟁은 지나갔지만 상처는 너무도 아프게 남았다. 우리 동네 앞에서 접전이 벌어진 다음 날부터 끝도 없는 미군차량이 줄을 이어 지나 갔을 때(1.4후퇴 직후 인 것 같다) 여자들은 치깐으로 숨고 우리는 길가에 서서 헬로 오케이를 뇌까리며 미군들이 먹다가 던져 준 쨈 통을 핥아 먹으며 횡재나 하는 듯 했다. 그들이 지나 간 자리에 깜둥이 아이를 낳은 처녀나 아낙네들이 자살을 하거나 마을을 떠나야 했다. 지금 쯤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후 40년이 지난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 창녀촌에서 순창 구림면 출신의 윤금이라는 아가씨가 의정부에서 미군 공수부대 출신 케네스 마클이라는 병사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녀에 몸에 쑤셔 넣은 병과 우산대 박힌 사진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으며 한미행정협정을 바꾸는데도 도움을 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다. 치졸하게도 나는 순창사람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더 열심히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 같다. 그것도 고향 그리움의 하나라고 변명하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6.25가 지속되고 있다.

   
▲ 사진 출처 / News1


오늘날 내가 통일운동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95년에 나는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의 고향 순창에서 익힌 정서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해에는 지리산 피아골과 회문산과 가막골을 둘러보며 당시에 전쟁이 갈라준 내편 저편이라는 이유로 숨져 간 영혼들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 비극의 원죄인 분단민족을 치유하는 길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통일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이 길 만이 사는 길이요,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길이며, 세계를 향한 웅지를 펼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 50주년을 맞았지만 분단 50년을 살아왔다. 우리는 1995년인 금년도에는 반드시 통일에 대한 큰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한다. 위로부터 주어진 역사를 마감하고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창조해야한다. 강대국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난도질하고 우리에게 강요한 민족 운명을 걷어차고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남북이 하나로 연대하는 길 밖에 없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준비하여 금년을 희년으로 선포 한데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하여 나는 종교인들과 정당과 재야가 하나로 어우러져 분단 50주년 행사를 함께 하는 큰 판을 짜기 위해 땀 흘릴 것이다. 결국 남북의 정부까지도 함께 해야 하며, 통일운동의 제3세력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통일을 향한 민족사의 분수령을 만드는데 이바지할 것이다. 나는 민족통일의 선물을 안고서 나를 명절 때마다 기다리고 있는 동네 형님들과 아주머니들, 그리고 이모들 조카들의 인정이 차고 넘치는 고향에 가고 싶다.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고마운 친구들인 정남이 용택이가 있는 순창에 가서 그들과 손잡고 저 부유물질이 떠도는 썩어 가는 섬진강 살리기를 위해 애쓰고 싶다.

   
 

   
 


*이 글은 1995년 3월 30일 목요일 자 순창신문 74호 향우 칼럼에 실린 것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원문보기: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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