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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술 서 (3/17, 진술인: 이해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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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교회 (jumin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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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7일 00시 00분 0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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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술
서 진술인 : 이해학 (1945. 3. 5일생) 주소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정북로 92, 407호 (태평동,주민태평동락컴뮤니티) 진술인과 김진홍,
이규상, 인명진, 박윤수, 김경락은 1974년 1월 1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서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긴급조치1호 위반 형사처벌과 관련하여 수사과정에서 당한 불법행위 등 본인이 당한 피해
내용에 대하여 추가 진술을 합니다. 1. 1974. 1. 17. 진술인을 포함한 본 건 피고인들은 당시 KNCC 김관석 총무
집무실에서 긴급조치 반대 시국기도회를 갖고 본인이 성명서를 읽었습니다. 성명서 내용은 “하나, 긴급조치 철회하라. 둘, 유신헌법 폐지하라. 셋,
민주주의를 회복하라.” 이었습니다. 반대서명을 받으러 다른 사무실을 돌다가 갑자기 달려든 정보원들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자기들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도 않고 범죄사실 고지도 없었고, 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이 무조건 연행하여 동대문 경찰서를 거쳐 남산 중앙정보부로
이송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본인은 지난해(1973) 9월 재미교포 신문기사에 당시 국내 신문에는 한 줄도 안 난 박형규 목사 구속
사실과 그의 설교문이 실린 신문을 복사하려 을지로 인쇄소에 맡겼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5일간 빨가벗기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침대목으로 사정없이 맞아, 온몸이 시퍼렇게 고문당한 경험이 있어, 차라리 우리를 태우고 가는 자동차가 어디에 부딪쳐 사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였습니다. 그 때는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후, 그 납치팀이 나를 공산주의자와 연결하여 김대중과 연계시키려는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 때 4층에서 조사팀장이 경찰에서 파송 온 일제 형사출신 일명 ‘최철통’ 이라 불렀음.) 나는 겁이 나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에, 지금까지 어디에도 이 사실을 발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표현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치욕스런 부끄러움 때문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2.
중앙정보부에서는 여섯이 각방에 들었고 주로 한사람의 조사관이 취조하였습니다. 얼마 후 서울구치소로 옮겨졌지만 구치소로 옮겨진 후에도 4일 정도
밤마다 정보부로 데리고 가서 밤샘 조사했습니다. 정보부에서 잠 안 재우기와, 같은 말 다시 쓰고, 다시 묻는 것을 반복하였습니다. 말로는
“우리가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해주는데 지난해에 정보부에서 자살했다고 발표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우리가 죽였겠느냐? 괜히 빨갱이들이 선동하는
것이지.” 하면서도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화가 폭발하여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습니다. 그리고는 못 먹는 담배를 권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습관을 참느라 애쓰는 것 같았으나, 화가 나면 본색이 들어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된 질문을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웃는다고 역정이 터져 한참을 화풀이를 하고는 약을 한주먹씩
먹곤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이들 앞에서 ‘벌거벗은 매뚜기’라고 느끼며 고문 받은 산 경험이 있기에 나에게 하듯 하면 능히 사람
죽이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헌법개정백만인청원운동으로 구속한 장준하 백기완님은 긴급조치를 소급적용하였지만 우리는 최초로
긴급조치를 짓밟고 구속되었기에 우리에게서 평양을 다녀왔다는 고백을 강요하고 간첩과 접촉한 것처럼 만들고자 하였으나, 우리들의 인맥이 너무
단순해서 자기들의 의도대로 연결하지 못한 듯합니다. 3. 남산 중앙정보부의 거대한 음모는 주범 바꾸기입니다. 나를 수사하던
조사관이 갑자기 분노하며 내게 호소하기를 “이해학이 분명히 주범인데 김진홍을 주범을 만들려한다. 윗선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투덜댔습니다. 나는 그럴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대질신문을 하자고 말 하였지만 김진홍 조사관 까지 와서 나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여, 결국 김진홍이
주범으로 나는 종범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내가 이 사건을 기획한 것은 74. 1. 8일 대통령긴급조치 발표후 서울 제일교회 사무실에
모인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 실무자 모임에서 총무인 권호경목사는 이제 긴급조치 하에서는 빈민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토론한 결과 이제부터는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을 조직할 책임을 누가 맡는 게 좋은가 질문할 때에 김동완이 이해학이
맡는 게 좋겠다하여 나는 조직의 합의로 이번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맨 처음 당시 가깝게 지내던 청계천 활빈교회 김진홍 전도사를 찾아가서
설득하였습니다. 그가 쾌히 허락하고 인명진을, 인명진이 김경락을 동참시키고 내가 이규상, 박윤수를 설득하여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사에 기본도 안 지킨 중앙정보부가 주범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외압에 의해서. 수사관들 말로 중앙정보부 생긴 이래 서로 주범싸움을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감동스런 평가를 하였습니다. 4. 검찰청에서 문모 검사는 내게 한 마디의 조사도 안하였습니다. 내가 구치소에서 포승줄에
묶여가지고 검사실에 들어가 서 있었습니다. 검사인 듯한 자가 나와서 힐끗 보고서는 “꿇어 앉쳐 놔! 나 이발 간다.” 하고 나간 것이 끝입니다.
모든 조사는 보조원이 질문하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온 문건을 반복하는 선이었습니다. 다시 긴급조치에 도전한 것은 평화로운 민주국가에 도전한 것이며,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다고 자백토록 이리저리 질문을 반복해서 엄청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5. 군법재판장에는 방청석에 제한된
가족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첫번째 주재판인 이세호 대장은 영락교회 집사이면서 우리에게 “왜 신앙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지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느냐?”고 다그쳐, 유일한 변호사인 한승헌 님은 참다운 신앙인은 역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자세로 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을 해왔습니다. 나중에 부정축재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옷 벗은 이세호 대장은 결국 우리의 행동은 북한만 이롭게 하였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6. 그 해는 수십 년만의 혹한이라고 매일 영하 20도 이하로 날씨가 계속 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사과정에서 가족,
변호인 접견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치소 독방에 수감하고 침낭이나 책을 받게 되어 있는 데도 일체 주지 않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영하
25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에 판자냉방에서 발이 얼고 귀가 얼어서 20여년이상 가려웠습니다. 7. 구치소에는 요시찰 대상자로 노란
딱지를 붙여 간첩 빨강딱지와 구분하고 있었고, 운동시간도 안 주었습니다. 민청학련 학생들이 무더기로 들어와 행형법에 운동시키도록 되어있다고
여론을 돌려 여기저기서 항의하니 일반 수형자와 별도로 짧게 운동을 시켜주었습니다. 식사는 곰팡이가 하얗게 핀 단무지를 비롯하여 먹을 수 없이
주었고 멀건 한 된장국물을 마시면 법자식기 바닥에 까만 모래가 한 겹 끼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연탄재더미에 뿌린 배추를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솥에 넣어 끓인 된장국입니다. 8. 특히 진술인의 구속기간 동안 지방 정보원들을 가동하여 고향인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에
사시는 작은 아버님이신 이선용을 비롯한 친척들을 찾아가 진술인이 ‘빨갱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친척 간의 관계를 훼손하여 놓았습니다.
9. 1975. 2. 15일 석방 날부터 성남경찰서 정보과에서는 권길상, 김성남 두 형사를 그림자같이 밀착 경호를 하여 내가 만나야 할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두 딸아이들 유치원 소풍을 따라가도 동행을 하고, 목욕탕은 물론, 고향 순창 조상들 성묫길도
함께하였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등반길에도 그림자 같이 붙어서 제 삶을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10. 제가 출소할 때 교인들이 3분의
1로 줄어서 겨우 노인네 몇 분과 학생들 무직 청년 20여명밖에 없었습니다. 성남시 민방위훈련, 예비군훈련, 중소기업인 모임 등 모든 교육에
주민교회를 음해하는 프로그램을 가동, 김남식 이라는 목사를 강사로 하여 ‘이해학은 빨갱이고, 주민교회는 불순한 반정부 집단’이라고 악선전을
공개적으로하여, 제 개인의 명예훼손은 물론 선교활동을 방해하였습니다. 또한 주변 군부대 비행장, 행정학교에 배치된 사병들에게 “이해학을
아느냐?” 질문하여 안다고 하면 제대까지 내내 한직에서 고생토록 하였습니다. 나중에 노동자들이 성남시 상대원 공단에서 발견한 것이지만 취업을
막는 노예문서인 ‘불렉리스트’에 우리교인 84명이 들어있어 제도적으로 생존권을 박탈한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이것이 민주국가가 할
짓입니까? 10. 미국 씨애틀에서 <반핵평화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으나, 국가적 요시찰로 분류하여
해외출국정지되어 여권을 내주지 아니해서 못 나갔습니다. 나 대신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금영균 목사가 대신 나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다섯 번이나
신청을 불허하다가 이 조치는 김영삼 대통령 때 겨우 풀렸습니다. 저는 갇혀 있을 때만이 아니라 석방되어서도 오래 동안 국민권, 생존권, 인권
등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이상은 진술인이 국가와 사법부로부터 당한 불법부당 한 사항입니다. 여기에 추호의 거짓이 있다면 본인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2015. 3. 17 .
위 진술인 이 해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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