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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그의 얼굴을 그대 위에 [밝게] 비추시고...” - 아론의 축복(민 6:24-26)에 대한 단상(2) 이주형 (pfrrhee)
2026년 08월 09일 15시 45분 14초 20

하나님의 얼굴과 관련되어 있는 구절은 전체 6개의 기원 중 2개, 다시 말해서 확고한 형식을 갖춘 세 개의 짝 중에 두 개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주시길(얼굴을 드시길) 바라는 기원이다. 왜 축복의 내용에 그것이 들어가 있을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축복의 내용으로 아주 적당한 듯 보인다.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얼굴을 밝히[비추]시는 것, 얼굴을 드시는 것’은 좀 생소하다. 물론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바라는 제사장의 바람이다. 앞에서의 예와 같이 이 하나의 문장 앞뒤의 내용은 상응하고 보완하고 규정하고 설명한다. 즉 ‘얼굴을 환히 비추시고’는 ‘은혜를 베푸시며’인 것이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창 33:10)고 말한다.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이다. 이는 아론의 축복문의 두 번째 기원과 상통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제사장을 통해서 드러나고 은혜를 입은 자 모두가 닮아가야 하는 얼굴이다.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 얼굴 뵙듯 하기를...]. 그 반대방향으로도 해석은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은 ‘환한 얼굴’을 그 축복의 대상자 위에 비추어 주시는 것이다. 세 번째 짝도 같은 원리 위에 있는데 ‘얼굴을 드시는 것’은 ‘평화를 주시는 것’과 같은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어쨌든 ‘하나님의 얼굴’은 실제로 이 축복문의 ‘얼굴’노릇을 한다. [이 축복은 압축된 시어이며 동시에 기도문이자 예배서인 시편에도 등장한다.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서도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시 67:1). 시편 67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는 축복문 아래 감사시를 위치시킨다]. 하나님의 얼굴은 축복문의 한 가운데 위치해 축복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룬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얼굴’은 앞에서부터 뒤로 연결되는 뼈대로서 축복의 근간이자 축복문을 떠받치는 등줄기이기도 하다.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숨기지 마시고!’라는 기원이 시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시 27:9; 69:18; 102:3; 143:7) 이 기원이 가진 중요성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발 등을 돌리지 말기를 비는 기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면(시 10:11) 거기엔 근심이 지배하게 된다(시 30:7).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드시면(시 4:6) 기쁨과 환희가 깃들게 된다(시 21:6). 따라서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라는 기원은 기도인 시편에서 아주 익숙한 것이다(시 31:16; 80:3.7.19; 119:135). 본래 하나님의 얼굴은 누구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보는 것을 –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처럼 – 견뎌낼 사람이 없으며 그를 보고서도 살아있을 사람이 없다(출 33:20).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 속에서도 파악되거나 만날 수 없으며 시도조차 되어서도 안 된다는 의도를 담은 형상금지계명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cf. 출 20:4; 신 5:8)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사 40:25; 46:5. cf. 시 115:1-8; 사 46:6-7). 두 번째 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접근불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접촉 가능성을 여는 것이 세 번째 계명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해 이야기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해주셨던 그와의 친밀성에 대한, 그리고 그렇게 그에 대한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출 33:11). [‘다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지 않았다’(vgl. 신 34:10)]. 실제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술하는 출애굽기 본문에서조차도 모세는 - 하나님께서 친히 가려주신 까닭인데 이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모세를 보호하신 것이다 - 그분의 ‘등’만 보았을 뿐이다(출 33:22-23). [이는 또한 앞서 모세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표상을 설명하려는 것인가? 참고로 ‘그의 얼굴’은 앞서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그의 얼굴은 그 자신이 이끄시는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있다(출 33:14-15 ‘내 면전이 [함께] 가리라!’)]. 그의 드러남을 표현하는 얼굴이란 ‘그의 영광’을 말하는데, 이는 ‘태워버리는 불꽃’과도 같다. 사실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출 24:17). 얼굴은 그러나 동시에 기본적으로 ‘면전에서’(in front of/im Angesicht)라는 위치를 뜻하며 대화하듯이 ‘마주 대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사람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실존이다. 그분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의 허용이 복이다. 하나님이 ‘상대’(Das Gegenüber)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친히 대할 수 있다니...

 

어쨌든 하나님과 대하게 되는 것이 행운이긴 하지만 - ‘하나님 앞에 선 존재’(Der Mensch vor Gott: H.-J. Kraus)이다. 성서의 인간학이다. 불가피 우린 그분 앞에 서 있다. 그를 피할 수 없다(cf. 창 3:8) - 만일 하나님과 대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찡그린 얼굴’을 하고 계시다면 어떨까? 물론 그분이 자기의 얼굴을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리신다고 할 때 이는 화가 풀린 표시이며 따라서 상냥한 얼굴을 전제한다(렘 3:12). 외면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위에’는 사실 ‘그대를 향하여’(zu dir hin)이다. 축복은 적극성을 담는다. 하나님의 동작이, 그분의 움직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제사장이 축복하는 사람 방향으로 돌리시는 것이다. [축복은 제사장의 바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기본적으로 그렇게 마주보게 된다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의미다.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한 기쁨이 우리에게 있을까? 하나님이 웃는 얼굴, 미소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것이다. 이미 그 의미를 밝혔지만, 하나님에겐 우리들과 같은 ‘얼굴’은 없다. 그분의 얼굴은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인가?

 

2-2-2. ‘하나님의 얼굴’과 태양

하나님의 친절한 얼굴은 진한 먹구름 사이로 반짝 얼굴을 내미는 햇빛 속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표상될 수 있다. ‘얼굴을 네 위에/너에게 비추시고’는 분명 햇빛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영상의 의미다. 두 동사는 그 빛을 비추는 것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비치다’는 ‘빛’과 같은 어근의 동사인데 창조의 보도에 등장하는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는 발광체’(창 1:15.17)를 가리킨다. 해와 달이다(cf. 시 121:6). 그러나 해는 모든 빛을 대표한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환한 햇빛의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다. 어둠과 대조되는 이 ‘빛’ 곧 하나님의 ‘얼굴 빛’은 몇 마디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태양과 일치될 수 없다. 창조의 이야기가 성서의 맨 처음부터 분명히 밝히듯이 태양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피조물은 그를 위한 불가피한 비유로서만 허용될 수 있다(cf. 시 19편)]. 특히 짓궂은 날씨를 자주 경험하는 시기엔 구체적으로 따듯한 햇볕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긋 웃는 태양이다. 실제로 ‘그의 얼굴’을 진술하는 ‘비추시고’(낮의 태양?)와 ‘드시고(아침에 뜨는 태양?)’는 이 이미지에 어울리는 동사며 동시에 어둠을 몰아내는 힘이다(시 18:28; 139:12). 따라서 새로 시작되는 환한 아침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동사는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시 139:9). 서서히 드러나는 그분의 친절함이, 그분의 온화한 미소가 드러나는 듯싶다. 그래서 아침햇살은 하나님의 환한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매일 경험하는 은총이다. [독일어에는 날씨에도 ‘친절한’(freundlich)라는 말을 쓴다. 또 실제로 햇볕이 많이 비취는 곳의 사람들은 밝고 쾌활하며, 일조량이 적은 지역엔 우울증 환자들이 많다]. 마지막 축복문의 ‘얼굴을 드시고’는 게다가 그의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얼굴을 드시면 그것은 관심을 표명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동작을 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환한) 얼굴’은 선택받은 백성들을 대하시는 그분 자신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표시다(cf. 사 59:2).